마을에서 남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숲. 그 숲은 나무가 복잡하게 자리잡고 자라고 있었고, 나무마다 너비와 지름이 큰데다 높게 자라서 쉽사리 길을 낼 수 없는 숲이다. 숲은 넓게 펼쳐져 있고, 남서쪽으로 지나갈수록 점점 가파른 경사면이 이어진다. 높은 나무가 경사면을 따라 빽빽히 늘어서있고, 그 너머로는 깍아지른 경사면이 이어진다. 나무도 자라지 않는 민둥산이지만, 반대편의 나무 뿌리들이 깊게 흙들을 붙잡아주고 있어서인지, 뾰족한 산은 낮아지거나 허물어지지 않고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다랗게 늘어선 산 때문인지 마을로 들어가려면 뱃길이 아니면 들어가기가 무척 힘들다. 단 한군데, 산맥이 끊어지고, 좁은 통로가 하나 있는데, 이 길에 마을 사람들은 성문을 두고, 흙으로 틈을 메운 다음, 남쪽에는 구운 벽돌과 돌들을 쌓아놓았다. 자연과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방벽이었다.
이 문은 마을로 들어가는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문이 있는 곳도 간신히 수레 하나가 지나갈 수 있는 폭이기 때문에 성문을 공략하는 방법으로 공격하려 하여도, 공격범위가 좁아서 공격할 수 없다. 오히려 많은 군사들을 세워두었다가는 문 위의 궁병에게 죽기 쉽상이었다. 돌이나 기름으로 문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경사가 있는 곳이라 공성병기를 옮기다가 까딱 잘못하면 깔리기 쉽상이었다. 마을의 병사는 200명 남짓한 숫자이지만, 수만의 군사들도 이곳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을을 침범하려는 무리가 문이 아닌 곳을 넘어가려고 무수한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산을 넘으면 항상 눈이 쌓여있고, 가파지른 언덕에 나무가 빼곡히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시야가 가려서 숲을 빠져 나오려고 헤마다가 얼어죽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기 마련이었다. 마을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산을 넘기 위해 갑옷이나 제대로 된 무기조차 들고 올 수 없게 된다. 오랫동안 그런 상황이라 마을에서도 성문 앞에 온 군사들에게만 신경썼을 뿐, 만약 소년이 없었다면 성문을 수비하던 사람들은 무척이나 허탈해 했을 것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과 소년은 굽이굽이 구부러진 숲 속의 길을 통해 숲을 가다 쉬다를 멈춰서 이틀만에 성문을 지키는 사람들의 캠프에 도착했다. 성문은 항상 50~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지키고 있으며, 계절이 변할 때마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과 교대로 지키게 되어 있었다. 성문이 공격받고 있을 때에는 200명 내외의 마을 총 인원이 이곳 캠프에 모여서 하루에 2번 교대로 성문을 지키고 있게 된다.
마을에서 봤던 사람들이 소년을 알아보고는 사냥꾼에게 사람을 보냈다. 나이 든 현자를 모시고 온 소년을 사람들은 별로 신기하게 보지 않는 듯한 눈치다. 그들은 소년의 무용담을 듣기 전이라 소년이 성문으로 온 것이 왜 온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나이많은 어르신을 부축하기 위해 왔을것이라 생각하나보다.
사냥꾼은 성문위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분명 그들은 너무나 느긋했다. 성에서 공격하기 위해 나가는 일은 없는 것을 알고 화살이 미치지 않는 먼 곳에 진을 치고는 병사들을 쉬게 하고 있었다. 적극적인 공격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척이나 이상한 행동임에 틀림없었다. 집단으로 산을 넘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냥꾼의 짐작은 맞아 떨어졌다. 별동대가 마을을 급습했었고, 소년과 꺽다리가 그 공격을 막았다는 어르신의 얘기에 사냥꾼은 안도와 함께 소년에 대한 대견함마저 느끼게 되었다.
덧붙여 어르신은 소년의 정체를 사냥꾼에게 조용히 알려주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소년의 신분이 왕족인 것을 안 이상 사냥꾼은 무척 곤란하게 되었다. 그를 돕고 같이 지냈던 시간을 생각하면 사냥꾼은 소년이 그저 자신의 아이와 같은 생각이 들기만 한다. 늠름하고 듬직한 아들. 그가 아직 아들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소년은 무척이나 살뜰하고 뿌듯한 존재였는데... 그가 왕자라는 사실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소년은 사냥꾼이 있는 곳으로 왔다.
"아저씨. 저 왔어요."
사냥꾼의 그런 맘이 얼굴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소년은 급하게 사냥꾼을 향해 달려왔다. 무언가 칭찬이라도 바라는 아이의 얼굴처럼 희색이 돌고 있는 소년을 본 사냥꾼은 무심결에
"왕자님, 장하십니다."
라는 엉뚱한 얘기를 해버렸다. 소년도 자기 자신이 '왕자'라고 불리는 것이 어색하다.
"아저씨, 그냥 예전처럼 대해주세요. 전 왕자도 아니고, 그저 떠돌이인걸요."
"그러나..."
"그러게나. 나처럼 늙은이나 왕자님을 왕자님이라 부를법하지. 자네에겐 어울리지 않아."
소년을 왕자라고 부르며 부담을 얹어주기 보다는 친근한 사이로 지내는 것이 소년에게 더 좋으리라 생각한 노인의 농담이었다. 사냥꾼도 멋적게 소년을 보며,
"그.. 그럴까...?"
라며 운을 떼본다. 서로 상기된 두 뺨을 맞대며 소년과 사냥꾼은 예전처럼 포옹하며 인사를 나눈다.
"마을에서 있었던 일은 들어서 알고 있다. 장하구나."
"꺽다리 아저씨가 다 막아주신 덕분인걸요."
"그래도 내 딸을 지킨건 너다. 그 아이가 무사하지 못했다면, 난 이곳에 있을 수 없었을 것 같구나. 네가 한 일이 이 문을 지킨 것과 다름없구나."
"그렇지. 지금까지 사냥꾼이 없었다면 적이 이 산을 넘으려고 얼마나 아웅다웅했을지 모르니까. 그가 이 곳에 없다면 군도 이 문을 공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을거야."
세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이 성의 의미와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 이곳을 지키는 방법 등등... 이번 일은 정말 예상외의 일이었기에 노인은 조금 걱정되는 눈치였다.
"이제 이 성에서만 지키는 것은 그만 하세. 아마 적은 점점 더 유효한 방법으로 성문을 지나지 않고 공격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어. 이제 곧 이 성문을 뒤로하고 마을에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러나 현재의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마을과 이곳에서 지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네. 왕자님이 이곳에 계시는 이상 더 기다릴 필요는 없네. 이전의 국토를 수복하기 위해서라도 옛 백성들을 모아 다시 군대를 편성해야지. 이번 습격의 결과를 적은 아직 모르고 있을 걸세. 우리보다 먼저 이 문을 넘지는 않을테니까. 빠른 시간안에 적을 습격해야 하네."
"적은 현재 활 거리보다 멀리 진을 치고 있습니다. 경사도 완만한 곳이라 낙석이나 화공도 하기 힘듭니다. 거기에 저희쪽 문은 하나. 적은 항상 이곳 문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나갈 수 있겠습니까?"
"적의 허를 찌르려면 적과 같이 길이 아닌 곳으로 이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네? 저 경사면을 타고 내려가자고요?"
소년은 어르신의 말에 짐짓 놀랐다. 성벽 주변의 산들은 가파르기도 했지만, 발 디딜곳도 없어 보였다.
"걱정말거라.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기 위해선 힘든 댓가를 치러야 하지만, 이곳에선 무척 쉽게 넘어갈 수 있단다. 물론 저쪽으로 넘어가면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다시 되돌아오기 힘들지만 말야."
소년과 사냥꾼의 걱정과는 달리 노인에겐 자신감 있는 모습이 베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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